토마스 로버트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
출생-사망: 1766-1834
국적: 영국
모교: 예수 대학
기여: 인구론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의 생애
맬서스는 1766년에 아버지인 다니엘 맬서스와 어머니인 헨리에타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니엘 맬서스는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와도 친분이 깊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맬서스는 루소파적인 시각에 따라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맬서스는 선천성 구개파열이었지만 1784년에 케임브리지의 예수 대학에 들어갔고, 오히려 대학교에서 영어상, 라틴어상 등 각종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은 웅변가였습니다. 그 이후 맬서스는 1788년에 잉글랜드의 교회에 있는 사제로 임명되어 이후 앨버리 마을에서 부목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793년에는 예수 대학의 펠로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케임브리지와 앨버리를 오가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과 콘도르세 후작(Marquis de Condorcet)이 주창하던 사회의 완성 가능성 이론에 대해 아버지와의 끝없는 지적 논쟁 속에서 맬서스는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쓰려고 생각한 이것이 유명한 <인구론>(1798)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인구론>은 비공식적인 논문이었습니다.
1804년 맬서스는 해리어트 에커설과 결혼하였고, 케임브리지 펠로우십을 박탈당하였습니다. 1805년에 맬서스는 헤일 베리의 동인도 대학에서 현대사와 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어 영국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가 되었습니다.
1810년에 맬서스는 주식 중개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금융 문제에 관한 논문 몇 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리카도에게 편지를 쓰고, 두 사람은 이후 10년에 걸친 대화를 통해 우정을 키웠습니다. 맬서스-리카도의 관계는 따뜻했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경제에 관한 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경제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둘은 정반대의 입장이었습니다. 둘의 논쟁에 관한 내용은 아래 맬서스의 경제학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맬서스는 3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곡물법의 영향에 관한 고찰>(1814), <지대의 본성>(1815), <곡물 수입 규제 정책>(1815), <정치 경제론>(1820) 등의 여러 논문을 기재하면서 여러 경제사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론>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 맬서스는 68세의 나이로 1834년 12월 23일에 사망하였습니다.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의 경제학
맬서스의 유명한 저작 <인구론>에서 맬서스는 인구증가가 억제되지 않으면 반드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경제의 성장이 부진해진다는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실제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사후적인 억제'(기아, 질병 등에 의한 사망률 상승)나 '예방적 억제'(늦은 결혼에 따른 출산율 저하)에 의해 식량이 생산하는 수치와 비례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맬서스는 '예방적 억제'에 더욱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맬서스의 이런 가설은 인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인구증가가 항상 식량생산보다 더 빠르게 증대하여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량을 따라잡지 못해 경제사회에 파국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추세라면 낮은 계급의 사람들의 소득을 올리거나 농업생산성을 개선해 삶의 질을 향상해 주려는 시도는 모두 헛수고가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추가 식량은 그에 따른 인구 증가로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는 한 사회의 완성 가능성은 절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게 맬서스의 논의였습니다.
<인구론>은 맬서스를 지적 유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냉혈 귀신이라고 놀림받고 미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구론의 진가를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저소득층 복지에 관해 진지한 경제 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1814년 맬서스는 당시 의회에서 곡물법(옥수수법)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제안된 보호주의적 법안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일시적으로 자유무역론자들을 지지하며 영국에서 곡물을 경작하는 것은 비싸기 때문에 영국이 부분적으로나 저렴한 외국 공급을 받아들이는 것이 식량 공급 측면에서 좋지 않겠느냐고 논했습니다.
이듬해 1815년에는 그는 생각을 바꿔 이번에는 보호주의 편에 서기도 하였습니다. 외국법은 종종 흉작기에 곡물 수출을 금지하거나 세금을 인상하므로 이는 영국의 식량 공급이 외국의 정책에 좌우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내생산을 장려함으로써 곡물법은 영국의 식량 자급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맬서스는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을 지속적으로 고수하였습니다.
1820년대에는 정치 경제의 대표자들 사이에서 지적인 토론이 벌어졌는데, 맬서스와 자유 무역의 이론가 데이비드 리카도의 이름을 따서 맬서스-리카도 논쟁이라고 불렀고, 둘 다 정치경제의 원리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The Nature of Rent>(1815)에서 맬서스는 고전 경제학의 주요 개념인 경제적 임대료를 다루었습니다. 리카도도 그의 <정치 경제와 세금 원칙>(1817)에서 임대료 이론을 정의했습니다. 리카도는 임대료를 실제 생산을 초과하는 가치로 간주했습니다. 임대료는 자유 무역보다는 소유권에 의해 야기되는 것인데, 집주인들이 토지의 희소성을 이용하여 토지 생산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일종의 부정적인 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과 반대로, 맬서스는 임대료를 일종의 경제적 흑자로 정의했습니다.
또한, 맬서스와 리카도의 대립은 경기 침체에 대한 정의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맬서스는 시장에서 공급과잉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리카도는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고 정의된 세이의 법칙에 따라 공급과잉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경기 침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맬서스는 공급과잉으로 인한 불완전 시장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맬서스와 리카도는 이렇듯 서로 경제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기술적 논의는 여러 영향을 미쳐 경제 사회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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