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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보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by 돈많은생각 2023. 7. 1.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칼 마르크스(Karl Marx)

출생-사망: 1818-1883

국적: 독일

모교: 베를린대학

기여: 마르크스 경제학

마르크스(Karl Marx) 사진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마르크스의 생애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가정에서 교육을 받다가 1830년에 트리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835년에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상위권이었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해 부친은 마르크스를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1836년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지만 마르크스의 관심은 철학에 있었고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사상 토론 동아리인 박사동호회에 가입했고 이때 극단주의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변증법을 이용해 사회와 정치, 종교를 좌익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지만 프로이센 정부가 자유주의와 청년 헤겔주의를 계속 비판하였기에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사 가서 언론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마르크스는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새로 창간된 급진좌파 <독불연지> 언론의 공편자로 취직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언론에 공산주의의 신념을 작성하였지만 <독불연지>는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하고 폐간되었습니다.

 

1844년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년~1895년)를 처음 만났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에 관한 주제로 논하였고 이로 인해 서로 마음이 맞아 평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포이어바흐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깨닫고 역사적 유물론 완성을 위해 1845년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기면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작성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 브뤼셀로 옮기면서 벨기에 정부에게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엥겔스는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 개념에 관한 최고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848년 유럽 전역은 시위와 반란으로 인해 대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부친의 유산으로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게 되었는데 벨기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체포하려 하였고 마르크스는 프랑스로 도망갔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에 잠시 머물면서 독일의 사회주의자들과 동호회를 설립하였고, 혁명이 독일까지 번지기를 기대하면서 1948년 독일 쾰른으로 다시 이동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정부로부터 계속 탄압을 받았고, 추방을 당해 파리로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파리에서도 마르크스를 정치적인 위협으로 판단하였고 마르크스는 1849년 런던으로 망명을 선택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계속 쫓겨나고 망명을 다니면서 궁핍한 생활을 하였고,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끊임없이 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갈구하고 그 내용을 기고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마르크스는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사상가 및 운동가였지만 철학자이기도 하고 신문 편집자이기도 하며 경제학자이기도 하며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의 본격적인 연구에 임하기 시작한 것은 1848년의 3월 혁명 때 참가한 혁명 운동이 패배한 후,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망명지인 런던에서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는 혁명의 날에 대비해 혁명 운동의 이론적 지주를 만들기 위해 경제학의 비판적 연구와 당시 자본주의의 최선진국인 영국의 경제·사회의 실태 분석에 몰두했습니다. 이러한 이론 연구와 실태 분석 성과의 집대성이라고도 불린 책이 <자본론>입니다.

 

마르크스는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면서 정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자본론> 제1부 <자본의 생산과정>은 그가 살아있을 때인 1867년에 간행되었는데, 제2부 <자본의 유통과정>과 제3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은 그의 평생 친구이자 공동연구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남겨진 초고를 편집하여 출판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을 연구하고 <자본론>을 쓴 목적은 사회주의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밝히고 역사의 한 단계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와 그를 대신할 사회주의 사회 성립의 필연성(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있었습니다.

 

다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모순을 품은 사회이지 결코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도 역사의 한 단계로 역사적인 의미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본주의야말로 생산력의 급속한 상승을 가져오는 동시에 다음 사회를 건설하는 변화를 담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상품을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는 돈(화폐)이 없으면 안 되듯이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자산가)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그 상품을 구입해 판매하거나 하였고 그만큼의 많은 화폐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 추구를 첫째 목적으로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자산가를 제외하고 자산가 이외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화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업에 고용해 달라고 하고, 다시 말하면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임금을 받아 생활에 필요한 상품을 살 수밖에 없는 노동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력까지도 상품이 되는 사회입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이며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경제 활동이 행해지고, 그것에 의해서 '사회적 필요'가 충족되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사회적 필요는 기업(자산가)의 이윤 추구 활동의 결과로 충족된다는 점입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어 산업이 도입되었고, 증기 기관 등의 새로운 동력원이 기계의 대규모화를 이끌었으며, 또 기계의 발전과 상호 촉진적으로 과학·기술도 급속히 발전해 갔습니다.

 

이러한 발전의 눈부심은 인구 증가율의 급상승이나 에너지 소비량(그리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급증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확실히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를 축적해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일부 기업(자산가) 계급과 하루 종일 일하고 겨우 생활할 수 있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자 계급이 생겨나 빈부의 차이는 심해졌습니다.

 

또, 기계에 의해서 노동이 숙련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누구나 일할 수 있게 된 반면, 인간은 기계의 페이스에 맞추어 단순노동을 장시간 반복하게 되면서 노동 본래의 기쁨은 상실되었습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시대가 되어 규칙적인 경기 순환(호불황의 물결)이 시작되어 거의 10년 주기로 대규모 경제 공황이 대량의 도산이나 실업자를 발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일할 능력과 의욕은 있지만 직업이 없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팔리지 않는 물품을 대량 생산하는 수단도 폐기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순에 찬 체제 속에서 실제로 생산과 관련된 노동자야말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체제를 만드는 운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한 자본주의의 비판적 분석 학문이 ‘마르크스 경제학’입니다.